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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소식
의학칼럼-기도

작성일 : 2021-04-01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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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병원 가정의학과 허윤정 진료부장

 

기도

 

“엄마는 맨날 누구를 위해 그렇게 기도해?” “하느님이 우리 딸 이쁘게 봐주시고 은총 많이 주시라고 기도하지.” “에이, 나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건 아니잖아. 치이….” “언니, 오빠랑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도 하긴 하는데, 너를 위한 기도가 제일 크지.” 사랑 투정꾼 막내딸의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이긴 하지만, 제일 크다는 건 살짝 거짓말입니다. 몇 년 전 사춘기를 시작하던 아들 녀석에 대한 제 욕심을 내려놓는 게 어려워 시작한 기도는 세 아이에 대한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의 뜻이 제 아이들에게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거의 20년 만에 본 대구가톨릭대학병원 마당의 성모상은 정겹다 못해 마음이 싸해져 옵니다. 본과 1학년 때 담도암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밤마다 소리 나지 않게 앓으셨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겠다고 맞춰 놓은 알람은 매번 저를 비켜서, 동틀 무렵 고통에 지쳐 겨우 잠든 어머니만을 깨우고야 맙니다. 어찌나 죄송하던지 고개만 푹 숙이고 부랴부랴 뛰쳐나가듯 학교 가는 길, 병원 마당에서 제일 먼저 마주친 성모상 앞에서 저의 무심함에 용서를 구하고 제발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주시기를 기도했었습니다. 그런 20대의 제 모습을 다 보고 계셨겠지요. 

오래전 아들 녀석 첫영성체를 준비하며 가정교리를 하던 중 사순 시기가 되었습니다. 최후의 만찬과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부분의 성경 구절을 읽고 침묵 속에 부모들끼리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의식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멈추지가 않았습니다. 다른 부모님들의 시선이나 부끄러움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입니다. 평소 퉁퉁하셨던 어머니는 암이 진행되면서 35kg으로 말라버렸고, 걸어 다니시는 것도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머니는 당신이 가시고 나면 철없는 딸이 제대로 된 밥이나 먹고 다닐까, 그것이 염려스러우신 나머지 미라 같은 몸을 끌고 서문시장에 토종닭을 사러 가셨습니다. 힘에도 겨운 튼실한 닭 한 마리를 끌고 와 정작 본인은 한술도 뜨지 못할 삼계탕을 끓여 놓으시고…. 그날 밤부터 열이 나셨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입원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아시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을 보면서, 딸을 위한 걱정에 마지막 힘을 내어 삼계탕을 끓여주신 제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이제껏 봐온 환자 중에 살아계신 분이 많을까, 하느님 곁에 계신 분이 많을까? 어쩌면 돌아가신 분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의사가 되고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더 많이 진료했으니 건강하게 사시다 가셨다 해도 돌아가신 분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요즘은 지나온 시간 동안 제가 봐왔던 환자들의 안부가 뜬금없이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봄이면 두릅이랑 고사리 뜯어다 주시던 금순이 할머니는 잘 계실까? 무릎이 아프다고 주사도 주고 침도 달라던 순남이 할매는 아들네 집에 가서 잘 살고 계실까? 만신이 다 아파 큰 병원가서 검사해도 원인을 모른다던 풍수 보는 영감님은 본인 묫자리는 잘 봐두셨을까? 또 제가 돌보다 주님께 보내드린 분들이 떠오르면 하느님께 그분들의 안부를 여쭈어 보기도 하고, 당신 곁에서 편안히 쉬실 수 있게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제 기도의 대상은 자꾸 늘어나기도 하고 변하기도 합니다. 올해는 고3 아들을 중심으로 기도해야지 하는데 언제부턴가 자꾸 순번이 뒤로 밀립니다. 제게 맡겨진 환자들 얼굴이 먼저 떠오릅니다. 막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다 보면 그냥 떡하니 앞에 있습니다. 생사를 앞에 두고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깟 고3이 대수일까요?

지금 저는 전인병원에서 암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이제 회복기에 접어들면서 일상의 건강을 찾고자 오시는 분도 있지만 예전의 제 어머니처럼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조용히 사투를 벌이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도 이제는 무덤덤한 일상이 되어 그분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제게 오시는 대부분의 환자 분들은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시기에 제가 평온한 마음으로 그분들을 바라볼 수 있나 봅니다. 하지만 가끔은 보호자 분들의 붉어진 눈시울과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면 제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합니다. 사실, 어찌 보면 의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도 몇 달을 버티시기도 하고, 잘 회복되다가 갑자기 나빠지시기도 합니다. 요즘 제 기도 지향의 맨 앞은 제 환자 분들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총이 한 톨도 빠지지 않고, 저를 통하여 그대로 그분들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호부터 허윤정 교수님의 “의학칼럼”이 연재됩니다. 허윤정 교수님은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으로, 종합병원 및 개원의를 거쳐 보다 포괄적인 진료를 위해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하여 현재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에서 가정의학과 진료부장으로, 외래 진료와 암환자들을 위한 진료를 하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도 겸하고 있습니다.

출처 : 월간 빛 2021. 04. ( 통권 4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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