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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소식
의학칼럼-슬기로운 병원생활

작성일 : 2021-10-01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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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허윤정 엘리사벳 |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분명 판타지 드라마입니다. 실력, 인성, 유머, 외모, 거기다 노래 실력까지 출중한 어벤져스 급 독수리 오형제 느낌의 의사가 나옵니다. 날마다 수술에, 당직에 찌들어 살다가 이제는 간이식으로 꽤나 유명해진 동기 얼굴 한번 보는 것도 수련마치고 15년은 족히 걸렸는데, 여기 의사들은 매일 모여서 밥 먹을 시간도 되고, 밤을 새워 수술하고선 밴드 연습을 할 수 있는 체력도 되고…. 그래서 볼 때마다 ‘저건 말도 안돼.’를 외치면서 보게 되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의사들의 능력과 그들의 환경이지, 환자나 보호자가 마주치게 되는 상황과 그 표정들은 제법 익숙해서 기억 속의 환자와 보호자를 어렴풋이 소환 해 주곤 합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볼 때면 슈퍼 히어로인 의사에게 감정이 이입되기보다는 환자나 보호자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번은 간이 나빠져 간이식 수술을 받게 된 딸과 가족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 딸도, 다른 가족들도 불안해 하지만 슈퍼맨 이익준(조정석 분) 교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합니다. 하지만 이 환자의 오빠가 보이는 태도는 불안과 불신의 경계 그 어디쯤을 넘나드는 보호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채혈하고 몇 군데나 멍이 들었다느니, 잘하는 간호사가 와서 하게 해 달라느니, 수액은 왜 빨리 교환해주지 않느냐는 등 까칠함과 예민함을 보이고 심지어 의사에게 수술 전날은 술도 마시지 말고 일찍 잘 것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는 병원에서 드물지 않게 보는 일입니다. 환자에게 검사결과와 치료 방향을 설명하는데 아무 말도 없이 녹취를 하고 있는 환자를 보고 상당히 언짢았다는 동료의 얘기도 떠오르고, 남자 친구와 간호사가 옆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아픈 여자를 진찰한다고 옷을 올리다 성추행범으로 몰릴 뻔했다며 황당해 하던 남편의 얘기,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만 믿고 검사를 거부하던 제 환자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하긴 우리 사회의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불신의 뿌리가 깊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일부 의사들의 행태와 사회의 전반적인 불신의 풍조가 원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치료 과정에서 환자와 의사간의 ‘라뽀(Rap­ port)’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프랑스어인 ‘라뽀’는 라틴어로 ‘나르다, 항구’라는 뜻을 가진 port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심리학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어적, 비언어적 관계를 뜻하는데, 의료인들 사이에서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의 정도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라포를 형성한다는 말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놓는다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치료 과정에서 라뽀가 형성되지 않으면 치료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결정을 맡기는데 믿음이 없다면 따라갈 수 없는 일이지요. 따라서 라뽀를 형성하는 일이 의사에겐 치료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외래에서 보면 한 가지 증상을 가지고 자의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빨리 낫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마치 쇼핑을 하듯 다른 병원으로 갑니다. 어떤 증상에 대한 검사와 치료에는 거쳐야 할 공통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의학책에는 이에 대한 알고리즘의 표가 빽빽이 그려져 있지요. 환자의 증상과 앞선 검사나 치료의 결과를 보고 그 다음 과정을 진행하다가 갑자기 뚝 끊어버리고 다시 다른 병원에서 또 처음부터 검사와 치료를 반복합니다. 차라리 잘 낫지 않는다고 느껴진다면 처음의 그 병원으로 가서 호전되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씀을 드리고, 그 선생님이 다음의 프로세스를 진행하도록 하든가 또는 그 선생님이 해결할 수 없으면 해결해 줄 수 있는 다른 선생님께 그간의 치료 과정을 잘 기록하여 보내주시도록 하는 것이 낫습니다.

누군가를 믿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게 하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라뽀가 깨어진 상태에서는 똑같은 치료를 해도 이유가 어떻든 결과가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은 희한하게도 잘 전달됩니다. 저 사람이 나를 믿고 따라온다, 자신의 치료를 위해 나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그대로 전달될 때, 대부분의 의사들은 깊은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내 부모, 내 자식에게 느끼는 책임감과 유사한 색깔의 내 환자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없던 실력도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라뽀가 잘 형성되지 않거나 깨어지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환자에게 악영향을 끼칩니다. 어떤 검사나 치료를 권유할 때 저 의사가 돈만 벌려고 저런다는 시선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껏 제가 만난 의사 중에는 의사로서의 자존심을 버려가며 돈을 벌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게 흰 머리카락이 없었을 때는 그런 환자를 만나면 구구절절 왜 그 검사나 치료가 필요한지를 설명하며 설득하려 했습니다만, 이제는 의심의 시선이 느껴지면 ‘아, 내가 신뢰감을 주지 못했구나, 저 분에게도 나에게도 시간이 좀 필요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네.” 하고 입을 닫습니다.

드라마 속 우리의 이익준 교수는 그 까칠함과 예민함, 불신덩어리인 보호자의 태도도 묵묵히 받아주면서 우리 사정도 몰라주는 보호자라고 투덜거리는 인턴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가족 의 생명이 달려있는데 우리도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러기에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그 인턴은 엄마가 암에 걸려 아팠을 때 자기도 살려달라고 떼를 쓰고 따지고 했었는데 가운 하나 입었다고 벌써 다 잊어버려서 죄송하다고 울먹입니다. 그 장면에서 저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얄밉게 보이던 그 보호자가 바로 20여 년 전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의사 가운만 벗으면 누군가의 자녀이고 동생이고 부모인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러기에 의사는 환자와 보호자를 이해해야 합니다.

진심은 통합니다. 의사라는 사람과 환자라는 사람과의 소통, 서로에 대한 믿음과 이해. 이것이 왜 치료의 가장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의사가 환자를 정성으로 대하고 환자가 의사를 믿을 때 치료가 잘되고 빨리 좋아집니다. 명의를 불신하는 환자보다 보통의 의사를 신뢰하는 환자가 더 빨리 낫는다고도 합니다. 슬기로운 병원 생활의 팁 하나! 물론 의사가 라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을 다 해야겠지만, 내 몸을 맡기고 치료를 받고 있는 의사를 일단 내가 먼저 믿어주면 어떨까요? 나의 치료를 위해서 말이죠. 설령 나에 대한 이해도가 좀 떨어질지언정 절대 배신하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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